백두대간 사람들 29 하늘재-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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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강 댓글 0건 조회 206,281회 작성일 18-08-27 12:28본문
신라의 아달라 이사금이 서기 154년에 열었다는 하늘재는 역사가 기록하고 있는 고개 가운데 가장 오랜 고개다. 백두대간을 방패삼아 한반도 동쪽 귀퉁이에서 나라의 꼴을 잡아가던 작은 나라 신라가 제일 먼저 백두대간에 길을 낸 것은 무슨 연유였을까? 역사는 아달라 이사금이 길을 열었다는 것 이외에는 기록하지 않았다. 하늘재를 바라보며 늠름한 장군의 모습으로 선 포암산은 그 까닭을 알고 있을까.
포암산에서 뻗어나간 한 갈래의 능선은 월악산에 가 닿는다. 지금은 영봉이라 부르는 월악산 최고봉을 옛날에는 국사봉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월악신사(月嶽神社)가 월악산에 있었기에 그리 불렀을 것이다. 하늘재를 넘어 덕주사 계곡 수경대에는 ‘신라가 하늘에 제를 지내던 월악신사가 있던 곳. 이곳에서 제를 올리면 난리가 평정됐다고 한다’는 내력이 적혀 있다. 그 내력은 이 지역을 둘러싼 영토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했다는 이야기를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일 게다.
그러나 지금의 하늘재에서 옛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돌로 남아 있는 부처와 성벽뿐이다. 하늘재 동쪽 관음리의 들머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약사여래좌상은 몇 년 전 천년을 넘었을 탑을 도둑맞았다. 어느 부잣집 정원의 장식품이 돼 있을 그 탑은 이제는 더 이상 가난한 이들의 염원을 들어줄 수 없는 처지가 돼버렸다. 하늘재 길목을 바라보고 있는 약사여래입상은 금방이라도 말을 건네고 싶은 몸짓이지만 형체만 겨우 남은 얼굴에는 그 이야기를 들려줄 입이 없다. 산으로 더 올라가 바위에 양각된 마애반가사유불상은 여전히 오른손을 턱에 괸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그 부처들이 언제 조성됐는지, 왜 조성됐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큰 가람이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문경지>는 관음리 불상들의 내력을 전설에서 찾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가나문’이라는 보살이 하늘재 길목에 관음사를 창건하자 많은 이들이 수도를 위해 찾아들어 지금의 마을이 됐다고 적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토록 큰 가람을 개인이 그것도 승려가 아닌 보살의 신분으로 이뤄냈다는 것에는 의심이 남는다. 절집의 주춧돌이야 길을 새로 내고 밭을 일구느라 없애버렸다고 믿어도 그 흔적은 남아 있어야 한다. 부처들의 마모 정도도 그저 세월의 힘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다. 무언가 연유가 있을 터였다. 그 연유를 찾고 싶었다.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한 하늘재 고개 마루에서 소녀 같은 하얀 미소를 간직한 비구니를 만났다. 곱게 닦은 고무신은 구름보다 더 하얗고 먹물옷은 같은 회색 아스팔트에 묻히지 않는다. 부처의 내력을 묻는데 엉뚱하게 생명타령이다. “풀 한 포기도 함부로 뽑지 마십시오. 그 풀에 기대어 사는 작은 생명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풀 한 포기가 뽑히면 그 생명들이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하게 됩니다. 그 에너지가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사람의 생각으로는 상상하기 어렵지요.” 스님은 예까지 왔으니 “산이나 보고 돌아가라”면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이라며 자리를 잡아준다. 파랗게 열린 하늘을 지탱하고 서 있는 문경의 산들이 저녁 해를 받아 빛나고 있었다. 스님은 저 산들을 보면 미륵리 부처들의 연유를 헤아릴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수행을 업으로 삼는 스님네들에게나 통하는 말이었다. 아름다움 이외에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지지 못했다면 굳이 보려고 하지 마세요. 과학으로 풀어낼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아요. 뒷날 그것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분이 오겠지요.” 참선 도중 몸을 풀기 위해 포행에 나섰다는 스님은 저녁 예불을 핑계 삼는다. 돌아선 스님의 하얀 고무신을 뒤쫓았다. 절집보다는 여염집에 더 가까운 절에 들어섰을 때 스님을 기다린 것은 꾸지람이었다.
주지스님 아니면 조실스님일 듯싶었다. ‘반연’을 끌어들였다는 질책 앞에서 비구니 스님은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절집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스님은 이곳만은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바람이었다. “동강을 보십시오. 지키겠다고 떠들더니 결국 어떻게 돼가고 있습니까?” 어떤 목적으로도 절집의 위치나 이름을 말하지 말라는 스님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오직 수행을 위해 신도와도 담을 쌓고 지낸다는 설명이 보태졌다.
다시 하늘재로 돌아왔다. 지난해 아스팔트를 깔았다는 도로는 지나는 차를 만나기 어려울 정도로 한산했다. 문경 사람들은 하늘재 나머지 절반도 포장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고개 넘어 미륵사지를 찾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문경까지 이어지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월악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장은 안 될 말이라고 일언지하에 말을 자른다. 다행히 하늘재의 충주쪽 내리막은 국립공원구역이었다. 공원쪽에서 동의를 하지 않는 한 길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
아스팔트가 끝나는 길목에 승용차 한대가 막 길 떠날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아침 8시에 문경의 조령을 출발해 하늘재까지 백두대간 구간 종주를 마쳤다는 이들이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 까만 비닐봉투가 남았다. 쓰레기였다. 굳이 산에서 들고 온 쓰레기를 여기서 놓고 가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스님의 걱정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늘재의 절반이 비포장인 채로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미륵사지를 찾는 관광객들에 생계의 상당 부분을 의지하고 있는 충주 미륵리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김정호(74) 할아버지는 국립공원이 되어도 나아진 게 하나도 없다고 불평하면서도 “관광객이 들어왔다 나가야지 지나가면 되나”라는 말로 속내를 대신한다.
미륵사지 미륵불은 수많은 전설을 안고 있는 곳이다. 마의태자가 세웠다는 전설은 익히 알려진 것이었지만 그 미륵불을 가시덤불에서 구한 허 보살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만 해도 지금의 미륵리사지는 마을과 농지 그리고 가시덤불이 뒤엉킨 곳이었다고 한다. 미륵부처를 감쌌던 가시덤불을 거둬낸 이가 허 보살이었다고 한다. “현몽했다지 아마. 미륵님이 꿈에서 본 것과 똑같더래요. 그래서 옆에다 움막 짓고 살았지.” 허 보살은 덤불을 일일이 손으로 거뒀다고 했다. 생계는 탁발로 이으며 수년을 공들인 끝에 지금의 미륵부처 모습이 세상에 나왔다는 것이다. 불타는 소나무가 반대로 넘어져 다치지 않고 홍수까지도 피해갔다는 등의 이야기는 그만한 크기의 미륵부처라면 으레 전해지는 영험으로 미뤄놓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이 사라진 하늘재 역사를 대신할 수는 없다. 엄청난 규모의 귀부는 멀쩡한 데 탑신은 깨진 조각조차 찾아지지 않는 이유는 누군가의 고의가 있었다고 믿을 수밖에 없게 한다. 발굴을 통해 미륵사지에 고려의 원(院)이 있다는 것을 밝혔지만 하필이면 경건해야 할 사찰 바로 옆에 당시의 여관인 원을 둔 이유도 이해할 수 없다.
창건 전설에 등장하는 왕건의 할아버지 이야기는 삼국을 재통일한 고려의 역사 왜곡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게다가 미륵대원사 부처의 얼굴이 길목에 버려진 까닭은 또 무엇일까?
하늘재의 이편과 저편에 남아 있는 돌부처들은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한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때까지 보려 하지 말라’던 비구니의 충고는 역사를 제 편한 대로 읽어온 우리네 역사 해석을 걱정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하늘재에 전하는 숱한 전설은 우리가 그동안 믿어왔던 사실들을 뒤집고 있다. 전설은 마의태자가 왕건과 끝까지 대적했다는 것을 전하고 초기의 신라가 기마민족의 전통을 지켜왔던 것을 증명하고 있다. 왕조가 바뀔 때마다 새 왕조는 정통성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 역사를 왜곡해왔다. 삼국의 역사는 아예 고려 때 새로 쓰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만이 정사로 인정되고 있다.
미륵사지 미륵부처가 푸른 이끼를 벗는 날 이 땅의 분단도 비로소 끝이 난다는 전설이 전한다.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이가 나타나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 달라는 옛 흔적의 호소로만 들린다
출처: http://100mt.tistory.com/entry/백두대간-사람들-29-하늘재-제대로-볼-수-있는-사람을-기다린다?category=223768 [<한겨레21> 신 백두대간 기행 블로그]
포암산에서 뻗어나간 한 갈래의 능선은 월악산에 가 닿는다. 지금은 영봉이라 부르는 월악산 최고봉을 옛날에는 국사봉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월악신사(月嶽神社)가 월악산에 있었기에 그리 불렀을 것이다. 하늘재를 넘어 덕주사 계곡 수경대에는 ‘신라가 하늘에 제를 지내던 월악신사가 있던 곳. 이곳에서 제를 올리면 난리가 평정됐다고 한다’는 내력이 적혀 있다. 그 내력은 이 지역을 둘러싼 영토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했다는 이야기를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일 게다.
그러나 지금의 하늘재에서 옛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돌로 남아 있는 부처와 성벽뿐이다. 하늘재 동쪽 관음리의 들머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약사여래좌상은 몇 년 전 천년을 넘었을 탑을 도둑맞았다. 어느 부잣집 정원의 장식품이 돼 있을 그 탑은 이제는 더 이상 가난한 이들의 염원을 들어줄 수 없는 처지가 돼버렸다. 하늘재 길목을 바라보고 있는 약사여래입상은 금방이라도 말을 건네고 싶은 몸짓이지만 형체만 겨우 남은 얼굴에는 그 이야기를 들려줄 입이 없다. 산으로 더 올라가 바위에 양각된 마애반가사유불상은 여전히 오른손을 턱에 괸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그 부처들이 언제 조성됐는지, 왜 조성됐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큰 가람이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문경지>는 관음리 불상들의 내력을 전설에서 찾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가나문’이라는 보살이 하늘재 길목에 관음사를 창건하자 많은 이들이 수도를 위해 찾아들어 지금의 마을이 됐다고 적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토록 큰 가람을 개인이 그것도 승려가 아닌 보살의 신분으로 이뤄냈다는 것에는 의심이 남는다. 절집의 주춧돌이야 길을 새로 내고 밭을 일구느라 없애버렸다고 믿어도 그 흔적은 남아 있어야 한다. 부처들의 마모 정도도 그저 세월의 힘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다. 무언가 연유가 있을 터였다. 그 연유를 찾고 싶었다.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한 하늘재 고개 마루에서 소녀 같은 하얀 미소를 간직한 비구니를 만났다. 곱게 닦은 고무신은 구름보다 더 하얗고 먹물옷은 같은 회색 아스팔트에 묻히지 않는다. 부처의 내력을 묻는데 엉뚱하게 생명타령이다. “풀 한 포기도 함부로 뽑지 마십시오. 그 풀에 기대어 사는 작은 생명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풀 한 포기가 뽑히면 그 생명들이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하게 됩니다. 그 에너지가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사람의 생각으로는 상상하기 어렵지요.” 스님은 예까지 왔으니 “산이나 보고 돌아가라”면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이라며 자리를 잡아준다. 파랗게 열린 하늘을 지탱하고 서 있는 문경의 산들이 저녁 해를 받아 빛나고 있었다. 스님은 저 산들을 보면 미륵리 부처들의 연유를 헤아릴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수행을 업으로 삼는 스님네들에게나 통하는 말이었다. 아름다움 이외에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지지 못했다면 굳이 보려고 하지 마세요. 과학으로 풀어낼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아요. 뒷날 그것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분이 오겠지요.” 참선 도중 몸을 풀기 위해 포행에 나섰다는 스님은 저녁 예불을 핑계 삼는다. 돌아선 스님의 하얀 고무신을 뒤쫓았다. 절집보다는 여염집에 더 가까운 절에 들어섰을 때 스님을 기다린 것은 꾸지람이었다.
주지스님 아니면 조실스님일 듯싶었다. ‘반연’을 끌어들였다는 질책 앞에서 비구니 스님은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절집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스님은 이곳만은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바람이었다. “동강을 보십시오. 지키겠다고 떠들더니 결국 어떻게 돼가고 있습니까?” 어떤 목적으로도 절집의 위치나 이름을 말하지 말라는 스님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오직 수행을 위해 신도와도 담을 쌓고 지낸다는 설명이 보태졌다.
다시 하늘재로 돌아왔다. 지난해 아스팔트를 깔았다는 도로는 지나는 차를 만나기 어려울 정도로 한산했다. 문경 사람들은 하늘재 나머지 절반도 포장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고개 넘어 미륵사지를 찾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문경까지 이어지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월악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장은 안 될 말이라고 일언지하에 말을 자른다. 다행히 하늘재의 충주쪽 내리막은 국립공원구역이었다. 공원쪽에서 동의를 하지 않는 한 길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
아스팔트가 끝나는 길목에 승용차 한대가 막 길 떠날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아침 8시에 문경의 조령을 출발해 하늘재까지 백두대간 구간 종주를 마쳤다는 이들이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 까만 비닐봉투가 남았다. 쓰레기였다. 굳이 산에서 들고 온 쓰레기를 여기서 놓고 가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스님의 걱정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늘재의 절반이 비포장인 채로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미륵사지를 찾는 관광객들에 생계의 상당 부분을 의지하고 있는 충주 미륵리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김정호(74) 할아버지는 국립공원이 되어도 나아진 게 하나도 없다고 불평하면서도 “관광객이 들어왔다 나가야지 지나가면 되나”라는 말로 속내를 대신한다.
미륵사지 미륵불은 수많은 전설을 안고 있는 곳이다. 마의태자가 세웠다는 전설은 익히 알려진 것이었지만 그 미륵불을 가시덤불에서 구한 허 보살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만 해도 지금의 미륵리사지는 마을과 농지 그리고 가시덤불이 뒤엉킨 곳이었다고 한다. 미륵부처를 감쌌던 가시덤불을 거둬낸 이가 허 보살이었다고 한다. “현몽했다지 아마. 미륵님이 꿈에서 본 것과 똑같더래요. 그래서 옆에다 움막 짓고 살았지.” 허 보살은 덤불을 일일이 손으로 거뒀다고 했다. 생계는 탁발로 이으며 수년을 공들인 끝에 지금의 미륵부처 모습이 세상에 나왔다는 것이다. 불타는 소나무가 반대로 넘어져 다치지 않고 홍수까지도 피해갔다는 등의 이야기는 그만한 크기의 미륵부처라면 으레 전해지는 영험으로 미뤄놓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이 사라진 하늘재 역사를 대신할 수는 없다. 엄청난 규모의 귀부는 멀쩡한 데 탑신은 깨진 조각조차 찾아지지 않는 이유는 누군가의 고의가 있었다고 믿을 수밖에 없게 한다. 발굴을 통해 미륵사지에 고려의 원(院)이 있다는 것을 밝혔지만 하필이면 경건해야 할 사찰 바로 옆에 당시의 여관인 원을 둔 이유도 이해할 수 없다.
창건 전설에 등장하는 왕건의 할아버지 이야기는 삼국을 재통일한 고려의 역사 왜곡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게다가 미륵대원사 부처의 얼굴이 길목에 버려진 까닭은 또 무엇일까?
하늘재의 이편과 저편에 남아 있는 돌부처들은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한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때까지 보려 하지 말라’던 비구니의 충고는 역사를 제 편한 대로 읽어온 우리네 역사 해석을 걱정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하늘재에 전하는 숱한 전설은 우리가 그동안 믿어왔던 사실들을 뒤집고 있다. 전설은 마의태자가 왕건과 끝까지 대적했다는 것을 전하고 초기의 신라가 기마민족의 전통을 지켜왔던 것을 증명하고 있다. 왕조가 바뀔 때마다 새 왕조는 정통성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 역사를 왜곡해왔다. 삼국의 역사는 아예 고려 때 새로 쓰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만이 정사로 인정되고 있다.
미륵사지 미륵부처가 푸른 이끼를 벗는 날 이 땅의 분단도 비로소 끝이 난다는 전설이 전한다.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이가 나타나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 달라는 옛 흔적의 호소로만 들린다
출처: http://100mt.tistory.com/entry/백두대간-사람들-29-하늘재-제대로-볼-수-있는-사람을-기다린다?category=223768 [<한겨레21> 신 백두대간 기행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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